챕터 20.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1. "천국은 마치 집주인이 아침에 포도원에 일꾼을 고용하러 나간 사람과 같으니라.
2. 그리고 그는 일꾼들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에 합의한 후에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3. 그리고 세 시간쯤에 나가 보니, 다른 사람들이 시장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4. 이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무엇이든지 정당한 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하시니라. 그러자 그들은 떠났다.
5. 여섯째와 아홉째 시간쯤에 다시 나오시니, 예수께서도 이와 같이 하셨다.
6. 열한 시쯤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왜 하루 종일 멍하니 서 있느냐' 하시니.
7. 그들이 대답하되,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포도원으로 들어가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은 너희가 받을 것이니라' 하셨다.
8. 저녁이 되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꾼들을 불러서, 마지막 사람부터 첫 사람까지 품삯을 주라' 하니, 청지기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9. 그들이 열한 시쯤에 [고용된] 그들이 왔을 때에, 그들은 각각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10. 처음 왔을 때에 그들은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각각 데나리온을 받았더라.
11. 그리고 받으면서 그들은 집주인을 원망했습니다,
12. 이르되 '이 마지막 사람들은 한 시간 동안 일했는데 주께서 낮의 무게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동등하게 만드셨나이다' 하더라.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친구여 내가 너를 불의하게 대하지 아니하노니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에 동의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13.
14. 너는 네 것을 가지고 네 길로 가라 그러나 나는 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도 네게 준 것 같이 주리라.
15.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느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하냐?
16. 이와 같이 나중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니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음이니라."
대부분 단순한 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의 머리 위로" 말씀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도 -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서처럼 - 그분의 의미는 그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예수님은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리대로 사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말씀이 다양한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이런 방식으로 주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영적 위험은 신성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진리대로 살다가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 때 발생합니다. 우리의 영적 안녕에 대한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좌에 앉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상의 통치에 대한 친숙한 개념을 사용하여 하늘의 정부에 대한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유라는 언어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3장에 명시된 대로, "비유 없이는 말씀하지 않으셨다"(13:34).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는 약속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신실함에 대한 큰 보상으로 여겨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현세와 내세에서 예수님을 계속 따르면서 '보좌에 앉는 것'의 더 내면적인 의미가 점차 드러날 것입니다. 2
흥미롭게도 보좌에 앉는다는 약속 뒤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부유한 젊은 통치자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계명을 지키고,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19:16-21). 부유 한 젊은 통치자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슬퍼하며 떠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19:22-24).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통치자로서 그들은 부자가 될 것이고, 통치자로서 그들은 "부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새 왕국에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할 통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 원수, 정부 지도자, 총리로서 존경을 받을 것이며, 간단히 말해 다른 모든 정부 관리들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을 아시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비밀스러운 말씀으로 이 일련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내면 세계의 재질서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 그들은 예수님이 영적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전혀 모르거나 기껏해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기 사랑은 맨 마지막에 해야지 첫 번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지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은 더 높은 사랑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먼저일 때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먼저일 때 우리는 지옥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우선순위가 정돈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마지막이 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가 될 것입니다. 3
물론 이 모든 것이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로마 제국의 멍에와 지배 아래서 최하위에 머물렀던 유대 민족이 이제 우월한 위치로 올라갈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왕좌에 앉은 통치자로서 '일등'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첫 번째' 자리에 있던 로마의 통치자들은 고귀한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나 '마지막'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처음(로마의 지도자들)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제자들)은 첫 번째가 되는 것입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보좌와 왕이 있는 지상의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염두에두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연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영적인 왕국을 다시 세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천국은 돈, 권력, 명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이 교훈은 아직 보상과 공로에 대한 생각에 젖어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서서히 전할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들은 아직 하늘의 기쁨이 보상에 대한 생각 없이 선한 일을 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정과 유용한 봉사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유로 계속 가르치시며 "천국은 포도원에 일꾼을 고용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간 어떤 지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20:1).
이 비유는 첫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아홉 번째, 열한 번째 시간(오전 6시,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사람을 고용하는 지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 고용된 사람은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기로 동의합니다. 세 번째, 여섯 번째, 아홉 번째 시간에 고용된 사람은 임금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만 있을 뿐 금액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주는 단순히 "내 포도밭에서 일하면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말합니다.20:4). 마지막 일꾼 그룹이 포도원으로 초대될 때 임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임금은 언급되지 않으며 지불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지주는 단순히 "가서 내 포도밭에서 일해라"라고 말합니다(20:7).
일꾼들에게 품삯을 줄 때가 되자,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열두 시간을 일한 사람들은 분노하여 지주에게 원망하며 "이 마지막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하루 종일 더위와 짐을 짊어진 우리와 동등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20:12).
언뜻 보기에는 분명 불공평해 보입니다.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지주가 한 시간 일했든 열두 시간 일했든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우리의 일반적인 공정성에 대한 감각을 거스르며, 그 영적인 의미를 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비유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말로 끝나는 이전 에피소드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비유에서는 이러한 반전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저녁이 되자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서 마지막 사람부터 첫 번째 사람까지 품삯을 주라'(20:8). 가장 늦게 채용된 사람이 가장 먼저 급여를 받고, 가장 먼저 채용된 사람이 가장 늦게 급여를 받습니다.
이 비유의 문자적 수준에서 눈을 들어보면 누가 "처음"이고 누가 "마지막"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처음과 마지막 일꾼은 모두 우리 자신의 일부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하루의 부담과 더위"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20:12), 는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사랑보다는 주로 개인적인 보상과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일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한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임금을 협상한 것을 주목하세요. 그들은 돈을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사랑에 대한 열정이 최우선이고 수고에 대한 보상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한, 우리의 수고는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의 언어로는 이를 "하루의 더위와 짐"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우리 각자가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합니다. 이전 에피소드의 부자 청년 관원처럼 우리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 직후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예수님께 비슷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중생이 시작될 때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삶으로 나아가려면 보상을 추구하는 행동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는 세 번째, 여섯 번째, 아홉 번째 시간에 고용된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지주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는 단순한 약속에 따라 일하기로 동의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발달에서 더 발전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주실 것임을 압니다. 구체적인 보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옳은 것"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뜻을 행한 것에 대한 보상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주된 동기는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주는 열한 번째 시간에 마지막 그룹에게 다가갔을 때 임금을 명시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가서 내 포도밭에서 일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발전에서 훨씬 더 높은 단계를 나타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으로 계명을 지킵니다. 다시 말해, 보상이나 의무감이나 순종이 아닌 사랑이 우리를 섬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4
자기 자신이나 보상에 대한 생각 없이 오직 타인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과 주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수고할 때마다 우리는 시간 감각을 잃게 됩니다. "나는 이 일을 해야 해"(의무)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어"(사랑)라고 말합니다. 하루 종일 일해도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것 같고, 1분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노동', 즉 사랑에 의한, 사랑에 의한, 사랑 때문에 노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랑에 감동하여 사랑으로 일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분은 실제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일을 하시기 때문에 힘들거나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선 에피소드에서 간구하신 것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30).
보는 법 배우기
지주는 불만을 품은 일꾼들의 원성을 듣고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합법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의 눈이 악한 것인가?"(20:15). 이 노동자들은 왜 12시간 동안 일한 자신과 1시간만 일한 다른 사람이 같은 임금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합의한 금액을 정확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주의 관대함이나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의 행운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불만족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불공평한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왜 나쁜 사람은 성공하고 착한 사람은 고통 받는지 궁금합니다. 옛 선지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왜 악인은 번영하는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왜 편안하게 사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예레미야서 12:1). 물론 우리는 정의가 세상에 널리 퍼지고, 노동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고, 무고한 사람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매 순간 우리 각자를 끊임없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일하시며 우리의 영을 지속적으로 다듬으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우리가 좋은 일로 인식하든 나쁜 일로 인식하든 어떤 일이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사랑의 능력을 확장하는 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5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하시는 하늘의 지주에 대한 모든 형태의 불평을 포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불평하고 비판하는 대신,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뜨고 주님께서 아무리 힘들어도 모든 짐을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깊게 하고 사랑을 키우며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로 바꾸실지 배워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가장 큰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는 주님을 향해 마음속으로 악을 생각하기보다는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세상에서 불의를 보더라도 주님을 악하게 생각할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땅 주인은 자신의 지불 방식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선하니 너희 눈이 악하냐?"라고 말합니다. (21:16). 6
사랑의 수고
이것이 바로 주님의 포도원에서 수고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수고하는 각 그룹은 우리의 영적 발전에서 중요한 단계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충실한 종으로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대로 포도원에서 수고하고 영적 여정의 여러 단계에 적합한 임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다면, 우리는 열한 번째 시간에 완전히 준비되고 원치 않는 "보상"을 받을 준비가 된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상은 주님께서 우리 영혼에 풍성한 축복을 저장해 두셨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7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있어 정말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한때 우리의 하루를 그토록 길게 만들고 우리의 수고를 무겁게 만들었던 이기적인 염려들은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대신, 그것들은 우리 의식의 주변부로 추방되어 이제 마지막 자리에 있습니다. 동시에 보상을 추구하는 행동이 사라지면서 어린 시절의 부드러운 감정과 순수한 신뢰가 다시 떠오릅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오랫동안 후순위로 밀려나 잊혀진 듯했던 '사랑의 수고'는 이제 다시 정당한 위치를 되찾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마땅히 있어야 할 첫 번째 자리에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21:16).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가 겉보기에는 불공평해 보이는 지주의 사업 철학을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의 영적 발전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비유는 주님께서 일생 동안 우리 각자를 그분의 포도원으로 부르시고, 주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과 세상의 것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에 사랑을 품고 수고한 모든 사람에게 열한 번째 시간에 풍성한 영적 상을 주시는 방법을 묘사합니다. 불과 몇 구절 전, 이전 에피소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 약속을 암시하며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백 배"나 더 큰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비나 어미나 처자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누구든지 백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이타적인 봉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가 경험하는 내면의 기쁨과 사랑은 외부 세계가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보상보다 "백 배" 더 나은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수고'에 참여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더 내면적으로는 우리가 수고의 기쁨을 경험할 때마다 주님의 기쁨을 마치 우리 자신의 기쁨인 것처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8
이 내면의 기쁨을 받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바라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이것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간접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한 아이를 두셨을 때 제자들에게 중요한 힌트를 주셨습니다. 포도원 일꾼에 대한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 힌트를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봉사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예수님은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마치시면서"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16).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맥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방금 제자들에게 지주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불평하는 일꾼들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내적 의미는 '열한 번째 시간'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축복, 즉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상이 아닌 사랑으로 봉사하는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경험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유산으로, 구하지도 않고 얻지도 않습니다. 생물학적 유전이나 삶의 환경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받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물은 평생 동안 우리와 함께합니다. 9
하지만 어린아이의 비자발적 수용성과 성인의 자발적 수용성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숙해지고 자유와 이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주로 자신에게 집중할 것인지 타인에게 집중할 것인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살 것인지 영적인 목적을 위해 살 것인지, 본질적으로 천국을 위해 노력할 것인지 지옥에서 살 것인지 선택합니다.
우리는 종종 오해되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라는 말씀을 고려할 때 선택의 자유에 대한 이 가르침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20:16).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예정하고 있으며, 더 나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받은 소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천국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인 것 같습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을까요? 결국, 하나님 아버지는 말할 것도없고 어떤 아버지라도 그분의 자녀를 지옥으로 예정한다고 믿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유일하게 합리적인 결론은 모든 사람은 천국을 위해 태어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도 포함됩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 즉 그분이 가르치는 것을 믿고 행할 자유와 외면하고 원하는 대로 할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따라 그분을 따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기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선택이나 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 협력하지 않기로 자유롭게 선택했기 때문에 선택은 우리의 것이고 잘못은 우리의 것입니다. 10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름은 계속됩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천국을 엿보고 예측하며 순간을 기뻐하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제공된다는 것을 신뢰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상태는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우리에게 무료로 주어집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초기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계속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불안이 없고 신뢰하는 상태는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께로 향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기로 선택함에 따라 점점 더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부름을 받았으며",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실제적인 적용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을 부르셔서 이타적인 봉사의 삶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도원 주인은 하루 종일 시장에 나가 많은 사람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섬기도록 부르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말씀의 모든 진리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까요? 영적인 삶을 시작할 때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결국에는 결국에는 공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의무감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우리는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즉시,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랑으로 그렇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발전된 상태는 "열한 번째 시간"으로 대표됩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보상에 대한 생각 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기로 선택합니다. 이 상태의 내적 기쁨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부름받은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1
봉사하는 법 배우기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길에서 따로 떼어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리니, 그들이 그를 사형에 처하리라,
19. 또 그를 이방에 넘겨 조롱과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자손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그분께 나아와 경배하며 그분께 무엇을 구하더라.
21.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니. 그녀가 그분께 이르되, "이 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로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제자들은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참으로 내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로 세례를 받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 하셨다.
24. 열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
25.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며 말씀하시되, "너희는 나라의 통치자들이 그들에게 주권을 행사하고, 큰 자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행사하는 것을 알고 있다.
26.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우리는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마음에 사랑을 품고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다음 에피소드의 가장 적절한 시작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불러 세 번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들이 그를 사형에 처할 것"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20:18). 이것은 유쾌한 메시지는 아니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놓인 일을 알고 계시고, 마셔야 할 슬픔의 잔을 알고 계시고,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길이 험하고 목적지가 멀어질 때 기억해야 할 좋은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그 밝은 미래로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길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합니다. 때때로 이 고난의 길에서 유일한 위안은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보실 것이라는 확신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어려운 메시지를 전하시는 동안에도 제자 중 두 사람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두 아들을 주님의 왕국에서 통치하실 때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물론 그녀는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이 세우실 지상 왕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20:22). 그런 다음 어머니가 방금 그들을 위해 중보한 두 제자를 향하여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로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20:23). 예수님은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치열한 유혹과 슬픈 투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들들은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합니다(20:22).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겪게 될 끔찍한 고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은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더 기쁜 예언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방인의 통치자들이 그들 위에 군림하고, 큰 자들이 그들 위에 권세를 행사하는 것을 너희도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게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크고 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과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5-28).
이 감동적이고 놀라운 말씀에 대한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침묵은 그들이 충격과 혼란, 실망을 느꼈음을 암시합니다. 최근에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그분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이제는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보좌에 앉아 통치자가 되라는 말씀과는 매우 다른 메시지입니다. 이제 주님은 섬김과 노예가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란 제자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적으로 이해할 때, 인자가 통치하는 것과 인자가 섬기는 것 사이에는 실제로 충돌이 없습니다. 인자가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신성한 진리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섬길 때, 그것은 진리가 선의 종으로 여겨져야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진리가 우선이지만(진리를 먼저 배워야 함), 삶의 최종적인 관점에서는 선이 우선입니다(유용한 섬김의 삶이 목표임). 즉, 진리는 선으로 가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중생의 시작에서 진리는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 기능은 법에 따라 왕국을 다스리는 왕의 기능에 비유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아들"(말씀의 신성한 진리)이 보좌에 앉아 통치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말씀의 진리가 우리 마음에서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중생의 시작 단계에서는 말씀이 통치해야 합니다. 우리는 표현과 만족을 위해 외치는 무질서한 감정의 덩어리를 제압하기 위해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진정으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 그 진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무질서한 감정과 욕망을 제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스러운 경전의 언어로 "보좌에 앉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시작에 꼭 필요한 진리는 결국 겸손, 용서, 선함, 자비라는 더 깊은 자질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신성한 진리(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신성한 진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선한 것을 보고 느끼고 행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보좌에 앉아 진리로 시작하지만 결국 진리는 섬김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우리를 중생의 목표인 선과 자비의 삶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12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왕좌가 아니라 섬김입니다. 18장 초반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포도원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며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먼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27).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꼴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섬기는 사람들)이 사실은 첫째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천국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29. 그리고 여리고에서 나가시니, 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랐다.
30. 보라, 길가에 앉은 소경 두 사람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다.
31. 군중이 그들을 꾸짖어 조용히 하라 하거늘, 그들은 더 크게 부르짖어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라.
32. 예수께서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느냐?" 하시니 32.
33. 그들이 예수께 이르되, "주여, 우리 눈을 뜨게 하옵소서." 하니.
34. 예수께서 긍휼히 여기시어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그들의 눈이 시력을 얻고 주님을 따랐다.
인자를 왕이 아닌 종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영적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먼저 진리를 배움으로써 중생의 과정을 시작하여 이기적인 욕망과 무시 무시한 충동을"지배"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다스리는 것은 성서의 언어로 왕, 즉 우리 삶에서 이성적이고 남성적인 원리에 비유됩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하와(우리의 절제되지 않은 애정)가 뱀의 음성(감각적 욕망)을 들은 후, 주님은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대로 "그가 너희를 다스리리라"(창세기 3:16). 13
여러 세대에 걸쳐 신실한 신자들은 이 구절을 남편이 아내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 왔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에베소서 5:22). 그러나 이 구절은 모든 성스러운 경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우리 개인의 중생과 관련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우리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생할 때 진리가 지배하고 욕망이 복종해야 하는 그 시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에 따라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우리의 무질서한 욕망이 절제되는 때가 옵니다. 우리의 거듭나지 않은 본성은 새로운 이해의 인도에 복종하면서 압력을 덜 받기 시작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안에 "새로운 본성"이 태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의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진리의 통치를 받기로 동의할 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14
따라서 다음 에피소드에서 두 명의 장님이 시력을 얻는 것이 적절합니다. 우리는 읽습니다: "길가에 앉은 소경 두 사람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20:30).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20:32). 그리고 그들은 "주님, 우리의 눈을 뜨게 하소서"(20:33). 긍휼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십니다. "즉시 그들의 눈이 고개를 들어 주님을 따랐다"(20:34). 15
실용적인 응용
이 에피소드에서 두 맹인의 치유는 우리가 중생하는 과정에서 영적인 눈이 더욱 밝아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전에는 진리가 일차적이라고 믿었지만, 진리가 진정으로 일차적인 것, 즉 이타적인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성스러운 경전의 언어로, 우리는 인자(신성한 진리)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위대함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이해합니다. 우리의 눈이 이런 식으로 시력을 얻을 때 우리는 기꺼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이 에피소드는 "그들의 눈이 높아져 그분을 따랐다"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20:34).
각주:
1. 주님의 신성한 섭리 231[7-9]: “최악의 모독은 처음에는 신성한 진리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지만 나중에 그 진리를 떠나 부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마태 복음 13:13).”
2. 천국의 신비 3857[7]: “제자들이 주님의 왕국에는 세상처럼 보좌나 통치 및 지배의 직책이 없으며, 어떤 사람의 사소한 면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 말을 거부하고 각자 주님을 떠나 자기 일터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내적 진리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외적 진리 안에는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 내적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드러나면 외적 진리들은 사라지고 오직 내적 진리에 대한 생각의 대상이나 수단으로만 작용합니다."
3. 참된 기독교 403: “사랑의 세 가지 보편적 범주가 올바른 방식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면 우리를 발전시키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우리를 손상시킵니다....... [이] 세 가지 보편적인 사랑의 범주는 하늘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1471: “사람의 내면은 주님 또는 주인이요, 그것과 관련된 외면은 종입니다. 사람의 내면은 하늘에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열려 있으면 그 사람 안에 하늘이 있고, 사람의 외면은 세상에 있으며... 세상은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하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4. 천국의 신비 9193: “신앙의 삶은 순종으로 계명을 행하는 것이며, 사랑의 삶은 사랑으로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10762: "주님의 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의 계명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내부에 있습니다." 및 묵시록 설명 295[12]: “신성한 사랑은 천사와 사람이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기를 사랑할 때 그분의 사랑이 그분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 외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5. 천국의 신비 6663: “세상에서 와서 주님의 계명의 삶을 살았던 대부분의 영들은 천국으로 들어 올려져 그곳의 사회에 합류하기 전에 그들과 관련된 악과 거짓에 감염되어 있으며, 결국 이러한 악과 거짓이 제거 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이전에 심어졌던 진리와 재화가 강화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주입됩니다; 이것은 전투원이 승리하는 모든 영적 전투의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이제 진리와 재화가 감염에 따라 성장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알 수 있으며, 이는"그들이 더 많이 괴롭힐수록 더 많이 번성하고 자랐다"는 의미입니다.
6. 천국의 신비 6574[3]: “우주적 영적 세계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끝이 지배하는데, 그것은 선이 그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심지어 지극히 작은 것조차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천국의 신비 10618: “악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지만 주님 안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악이 주님에게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악은 주님에게 기인합니다."
7. 묵시록 설명 194: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것'은 말씀에서 진리와 선을 아는 지식을 삶의 용도에 적용하여 스스로 영적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포도원'은 영적인 교회를 의미하며, 한 사람의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셋'은 '여섯'과 '아홉'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상태, 즉 끝까지 완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열한'은 아직 충만하지 않은 상태, 즉 잘 발달된 어린이와 유아가 있는 것과 같은 수용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수고한 '열두 번째 시간'은 진리와 재화가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1906: “사람이 세상에 들어와 쾌락과 정욕에 빠지고 악에 빠지면 유아기의 천상의 것들은 사라지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8. 천국의 신비 5094[3]: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하늘을 통해 들어오는 생명의 유입으로 사는 것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4572: “기쁨은 하늘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9. 천국의 신비 530: “사람에게 유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 훨씬 더 사악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관련 항목 천국의 신비 1025[11]: “유골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참고: 순수함, 자선, 사랑의 이러한 부드러운 상태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 선과 진리의 다양한 측면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평생 동안 우리와 함께 "남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유품"이라고 불립니다.]
10. 참된 기독교 580[3]: “누구나 중생할 수 있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선과 진리 안에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함께] 영적인 것들에 대한 선택의 자유와 함께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이러한 것들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이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잘못입니다." 천국과 지옥 4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천국을 위해 태어났으며, 이 세상에서 천국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천국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11. 요한계시록 풀이 744: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실제로 모든 사람이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 그러나 '선택된'이라는 것은 예정의 결과로 일부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외적인 일에서 주님과 함께있는 사람들을 '부름받은'이라고 부르는 반면, 교회의 내적인 일에있는 사람들을 '선택된'이라고 부릅니다."
12. 참된 기독교 336[2]: “진리를 의미하는 믿음은 시간적으로 먼저이고, 선을 의미하는 자선은 최종 목적[일차적 목적]에서 먼저입니다. 그리고 최종 [목적]에서 먼저인 것은 일차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먼저입니다. 따라서 시간에서 먼저인 것은 실제로는 먼저가 아니라 겉으로만 먼저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 그 천국 교리 303: "'인자'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를 참조하십시오.
13. 천국의 신비 233: “창세기에는 '너는 네 남자[비르]에게 순종하고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남자'라는 단어는 '남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진리'를 의미하는 남성적인 [원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참조 묵시록 설명 721[26]: “자연적인 [사람의 수준]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정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리를 통해서만 제거 할 수 있기 때문에 "너는 네 사람에게 순종하고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말씀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사람이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을 통해 개혁되고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14. 결혼의 사랑 305: “인간의 마음에는 세 가지 영역이 있으며, 그중 가장 높은 영역은 천상의 영역, 중간 영역은 영적인 영역, 가장 낮은 영역은 자연적인 영역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장 낮은 영역에 거주하지만 종교의 진리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영적이라고하는 다음 높은 영역으로, 사랑과 지혜의 결혼을 달성함으로써 가장 높은 영역으로 올라갑니다. 가장 낮은 영역에는 온갖 악하고 음탕한 욕망이 존재하는데, 이를 자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높은 영역인 영적인 영역에는 악하고 음탕한 정욕이 없는데, 이는 사람이 새로 태어날 때 주님의 인도를 받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15. "그들의 눈이 올려다보았다"는 구절은 보통 "그들이 시력을 얻었다"로 번역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구절은 ἀνέβλεψαν(아네블렙산)으로, 문자 그대로 "그들이 올려다보았다"(3인칭 복수)는 뜻입니다.


